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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원회원( 전 사회과학원장 )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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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3,624회 작성일 12-07-23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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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취] 김경원 사회과학원장 별세… 국제정치 이론·현실 겸비 '한국의 키신저'

1975년 대통령 특보로 발탁, 美 엘리트 사회서 좋은 평가 조선일보 | 최현묵 기자 |

청와대 비서실장과 주미(駐美)대사 등을 역임한김경원(金瓊元·76) 사회과학원 원장이 22일 오전 10시 별세했다.

김 원장은 서울대 법대를 중퇴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 27세에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D%95%98%EB%B2%84%EB%93%9C&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723032507324" target=new>하버드 대학에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유학 당시 훗날 미국 국무장관이 된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D%97%A8%EB%A6%AC%20%ED%82%A4%EC%8B%A0%EC%A0%80&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723032507324" target=new>헨리 키신저 교수의 제자가 됐으며, 스승처럼 학계와 현실 정치 양쪽에서 활약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키신저'로 불리기도 했다.


뉴욕 대학과 고려대에서 강의하던 김 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1975년 국제정치담당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됐다. 박 전 대통령이 39세의 그를 특보로 발탁한 것은 미 국방부와 국무부 등 미국 엘리트 사회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좋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1980년 5공 출범 때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C%A0%84%EB%91%90%ED%99%98&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723032507324" target=new>전두환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기용됐지만, 대통령에게 듣기 싫은 얘기를 했던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5공 초기 내란음모 사건으로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D%8A%B9%EB%B3%84%EC%82%AC%EB%A9%B4&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723032507324" target=new>특별사면을 건의했다. 1980년 10월에는 신(新)군부 핵심부에서 '언론건전육성 종합방안'이라는 언론통폐합 초안을 만들어오자 "해서는 안 될 일이고 하기도 어려운 일"이라며 반대했던 사실이 12·12 사건 재판 과정에서 알려지기도 했다.

그는 1981년 주 유엔대사에 임명됐고, 이어 1985년부터 1988년까지 주미대사를 지냈다. 1983년 소련의 KAL기 격추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는 당시 유엔대사로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잘못을 유창한 영어로 질책했다. 당시 소련을 지원하던 나라들이 그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졌지만 이를 논리 정연하게 받아넘겨 유엔 외교가에서 화제가 됐다고 한다. 그의 영어 실력은 키신저가 "나보다 낫다"고 했을 정도다.

주미대사 시절인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때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군을 투입하면 안 된다'는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B%A0%88%EC%9D%B4%EA%B1%B4&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723032507324" target=new>레이건 미 대통령의 친서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89년 공직생활을 마친 뒤 사회과학원 원장이 됐으며, 계간잡지 '사상' 발행인, 고려대 국제대학원 석좌교수, 박정희 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 등을 맡았다.

김 원장은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관점에서 신문 칼럼을 연재하는 등 대표적인 국제정치 분야 논객으로 활약했다. 그는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A%B9%80%EB%8C%80%EC%A4%91%20%EC%A0%95%EB%B6%80&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723032507324" target=new>김대중 정부 초기에 한반도 주변 4강국과의 균형잡힌 외교관계 강화를 통해 '동북아 세력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변 4대 강국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21세기에 한국이 정치적 독자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동북아지역에 안정된 균형이 정착돼야 한다는 것이다.

'9·11테러' 직후인 2001년 10월엔 기명칼럼에서 '미국 대외정책의 패러다임이 바뀌었으며, 테러 근절을 가장 우선적 국가 목표로 추구할 것'이라 했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적인지를 최우선 고려 사항으로 할 것이란 점을 예견한 것이었다. 그는 김대중·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B%85%B8%EB%AC%B4%ED%98%84%20%EC%A0%95%EB%B6%80&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723032507324" target=new>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대북 포용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잇달아 발표하기도 했다. 북한에 대한 접근법 때문에 미국과 불필요한 긴장이 조성되는 것은 우리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김 원장의 주된 논지였다.

그는 독일 음악가 바그너에 대한 사랑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국내의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B%B0%94%EA%B7%B8%EB%84%88%20%EC%9D%8C%EC%95%85&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723032507324" target=new>바그너 음악 애호가들이 1993년 9월 만든 한국바그너협회 회장을 줄곧 맡으면서 전 세계 바그너협회 회원들과의 국제 문화 교류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박애경 여사와 김헌수 뱅크오브아메리카 메릴린치 아시아본부장, 김유수
검색하기" href="http://search.daum.net/search?w=tot&rtupcoll=NNS&q=%EB%B8%94%EB%A6%AC%EC%9E%90%EB%93%9C&nil_profile=newskwd&nil_id=v20120723032507324" target=new>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코리아디렉터 등 2남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