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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주 ‘만상’의 피가 흐르는 한독약품 회장 - 김영진회원(한독약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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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4,291회 작성일 11-12-29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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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빤스 팔아서라도 돈 갚을 사람’

부친 쌓은 신뢰 경영, 대를 잇습니다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비싼 땅 위에 빌딩들이 빽빽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만 해도 이 일대 고층 빌딩이라고는 국기원과 특허청 등 몇 개에 불과했다. 한독약품 건물도 그중 하나였다.

 “안녕하세요.” 빙긋이 웃으며 나타난 김영진(55) 한독약품 회장은 창업주 2세다. 회사는 1954년, 아버지 김신권 명예회장이 세웠다. 올해로 구순(九旬)인 김 명예회장은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출근한다. 회장실 맞은편에 동그마니 명예회장실이 보인다. “57년 역사 동안 언제가 가장 위기였나요?” 김영진 회장은 잠시 망설이더니 “지금인 것 같다”고 했다. 약값 인하 등 국내 이슈도 만만찮고, 글로벌 제약사로 도약하기 위한 더 큰 숙제도 있다. “아버님은 뭐라 하시나요?” 아들은 그냥 웃는다. “말씀 잘 안 드려요. 괜히 걱정하실까 봐….” 아버지와 아들, 경영진과 직원들이 서로를 가족이라 여기게 된 스토리를 들어봤다.

[j Biz] 중앙일보 글=이소아 기자 

소화제 훼스탈로 유명한 한독약품은 최근 일과 가정을 동시에 챙기기 좋은 직장으로 소문나 있다. 98년부터 주5일 근무제를 하고 출산·육아·태아검진 휴가, 육아기 단축근로, 재택근무 등도 실질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독약품이 무슨 뜻이죠.

 “하하. 무슨 특별한 단어인 줄 아는데 한국의 ‘한’이고, 독일의 ‘독’이에요. 독일 훽스트(Hoechst)사와 기술제휴(1957), 합작(1964)을 하면서 지은 이름이거든요. 당시 훽스트는 세계 최고 제약사였어요. 연구진 1600명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3명이나 됐어요. 처음엔 원료만 들여왔지만 합작을 하면서 원료를 직접 생산하는 단계로 발전한 거죠.”

●여성부가 ‘가족친화 경영기업’으로 뽑았던데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혹시나 해서 신청해 봤는데 막상 뽑히고 보니까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기업들이 참 (가족친화 경영을) 안 하고 있더라고요. 갈 길이 멀다 느꼈어요.”

●직원들의 가정생활을 배려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아무래도 미국·독일에서 근무할 때 배운 거 같아요. 그 나라들은 80년대에 이미 가정과 일의 균형을 위한 제도가 잘 돼 있었어요. 게다가 제약산업은 여성 인력이 상대적으로 많거든요. 약대 출신 여성들도 많고. 여성의 중요성을 많이 느꼈죠.”

●말로만 그러는 기업도 많죠.

 “770명 직원의 약 40%가 여성이에요. 심지어 영업사원도 30%가 여성이죠. 지난해 세일즈 챔피언도 여자였네요. 제약산업 특성상 섬세하게 작업할 일이 많고, 의학정보를 전달해야 할 일이 많아 여성들 적성에 맞는 것 같아요. 9개월 육아휴직을 써도 승진이나 커리어 관리에 전혀 지장이 없도록 하고 있어요.”

●9개월씩이나 쉬면 회사에 지장이 있지 않나요.

 “대체인력을 고용하고 있어요. 육아는 장기전이라 대체인력을 넣어줘야 해요. 구하기 쉽지 않지만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경영자로서 그런 비용이 부담스럽지 않나요.

 “결국 그게 이익이에요. 우리 같은 중견기업들이 최고의 인력을 얻는 방법은 바로 여성을 잘 활용하는 거예요. 여성이 일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면 기업 입장에서도 유리해요.”

●직원들 다이어트까지 시킨다면서요.

 “직원들이 먼저 하자고 제안한 거예요. 회사 빌딩이 20층인데 매일 한 번은 걸어 올라오기로 한 거죠. 20층에 올라오면 몸에 좋은 차를 마실 수 있게 녹색카페도 만들었어요. 청각장애우들이 바리스타인데 아주 인기가 좋아요.”

●회장님도 계단을 오르나요.

 “당연하죠. 먹는 걸 워낙 좋아해서 저도 다이어트해야 해요. 한 달에 열 번 이상 오르려고 수첩에도 적어놨어요. 올 상반기에는 90번 했네요. 20층 오르는 데 7분 걸리더라고요. 매일 조금씩 하면 몸이 달라져요. 굳이 헬스클럽 안 가도 생활 속에서 다이어트가 되는 거죠.”

●창업주 2세인데 어깨가 무겁겠어요.

 “2세는 잘해야 본전이죠(웃음). 잘하면 아버지 덕이라고 하고, 못하면 또 비난이 오고…. 하지만 자연승계는 아니에요. 합작사라서 독특한 구조거든요. 처음 근무를 한 것도 84년 훽스트에 파견돼서 일한 거고. 훽스트사가 2년간 근무하라고 요구하더라고요. 그때 경험이 참 많은 도움이 됐어요. 96년에 사장이 됐을 때도 합작사 동의가 필요했고요. 승계 시험이랄까… 그런 것들을 거친 거죠.”

●독일에서 뭘 배웠는데요.

 “투명경영이오. 거기선 회사비용, 개인비용이 정말 철저히 구별돼요. 출장비를 정산할 때에도 한 끼 접대 받으면 칼같이 그 비용을 빼야 해요. 직원들이 아침에 신문 보면서 커피 마시고 수다 떨고 이런 것도 없고요. 86년에 한독약품 경영조정실 이사로 와서 관리자들도 실무를 담당하라고 했더니 난리가 나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관리자는 결재서류에 도장만 찍고 있었을 때니까요.”

●원래 기업 운영에 관심이 있었나요.

 “고등학교 때에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려고 했어요. 옆에서 아버지 생활을 보니까 너무 힘들어 보여서요…. 저게 과연 의미 있는 삶일까 싶었죠. 그러다 부끄럽지만 부모님이 가라는 대로 경영학과를 갔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경영도 재밌겠다 싶은 거예요. 몰입하기 시작했죠.”

●회사를 꾸려오면서 가장 큰 위기가 있었다면요.

 “음… 지금인 것 같은데요? 물론 IMF 외환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는 나라 자체가 위기였던 거였죠. 거시경제에 영향은 있었지만 사실 제약산업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어요. 사노피가 적대적 인수를 해왔을 때에도 황당했어요. 생판 모르는 상대가 와서 뭘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죠. 결국 각자 기업을 운영해서 ‘윈-윈’하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고요. 경영권을 지킨 건 좋지만 갑자기 독립적으로 하려니까 신제품을 어떻게 확보할지 고민이 많았죠. 하지만 지금 이 위기는 전혀 성격이 다른 위기예요.”

●정부의 약값 인하 말인가요.

 “그렇죠. 아주 난제예요. 약값을 내리면 리베이트가 없어지고 건강보험 재정이 좋아진다는 논리가 사실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거든요. 최소한 업계가 적응할 수 있는 기간을 가지고, 대화도 해 가면서 가야 하는데 너무 한번에 확 가니까 안타깝죠. 고용 문제도 있고 한데….”

●제약사들이 그동안 너무 편하게 장사했다는 지적도 있어요.

 “아픈 지적이죠. 솔직히 우리 (제약)산업이 그동안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미흡했어요. 그건 반성해야죠. 한독약품도 그동안 합작사와 파트너십으로 오다 보니까 안전망이 있다는 생각에 ‘망할 리야 없지 않겠나’ 하고 방심한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이번엔 달라요. 패러다임이 완전 바뀌었어요. 이게 제일 어려운 거예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네요.

 “위기는 기회라고 생각해야죠. 내부적으로 준비할 건 준비하고 있고요. 제약산업은 인간의 건강을 다루는 산업이라 계속 발전해 나갈 거예요. ‘어떻게’가 관건이죠. 독자생존하고, 나아가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가지려면 국내 시장만 가지고는 안 돼요. 그동안은 합작이라 딴 데 진출도 못하고 했지만 이번 (약값 인하) 충격이 스스로를 깨우는 계기가 돼야 해요. 이제는 해외로 적극 진출해야죠.”

●구체적인 계획이 좀 있나요.

 “동남아시아 시장이 매력적이라고 봐요. 패러다임을 바꾸고 좀 다른 게임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회사 재무 상태 정도면, 다른 산업 같았으면 (영업이익 대비) 차입금 10배짜리 인수합병(M&A)도 하고 하는데, 우리 제약사들은 몸집이 너무 작아요. 몸집이 좀 돼야 연구개발(R&D)도 제대로 할 수 있어요.”

●사명을 바꿀 수도 있겠네요.

 “하하. 한독양말도 있고, 한독화장품도 있고… 좀 헷갈리기도 하죠? 사실 2005년에 심각하게 바꿔볼까 고려했어요. 하지만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린 이름을 바꾸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에요. 일단은 그대로 유지하는 걸로 하고, 최소한 한자(漢字)로는 안 써요.”

●이럴 때 참고할 만한 지침서가 있나요.

 “성경에 나오는 ‘달란트 이야기’를 좋아해요. 주인이 오래 집을 비우면서 하인들에게 각각 돈(달란트)을 맡기고 떠나요. 그중에 두 명의 하인은 그 돈으로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기죠. 그런데 한 하인은 돈을 그대로 땅에다 묻어놨어요. 여행에서 돌아온 주인은 이윤을 남긴 하인들을 칭찬하고, 땅에 묻어둔 하인은 쫓아냈어요. 여기서 중요한 건 ‘비즈니스 마인드’예요. 기독교 집안이지만 전 사람들이 기도만 하면서 뭔가를 바라는 게 싫었어요. 스스로 노력을 해야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겁니다.”

●열심히 살려고 해도 사회가 녹록지 않은 것 같아요.

 “맞아요. 특히 20대들에 대해 안쓰러운 마음이 있어요. 제 세대까지만 해도 나라가 한창 발전하는 시대라서 열심히 하면 뭔가 된다는 비전이 있었어요. 월급 받아서 서울에 집도 사고요. 그런데 지금 20대는 공부는 열심히 했는데, 취직도 잘 안 되고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는 것 같아요. 하지만 너무 쉽게 좌절하는 경향이 있어요. 부모님들이 하도 관리를 해오다 보니까 주어지는 것에 기대를 많이 해요. 희망과 비전은 얼마든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신입사원들에게도 이런 얘기 많이 해요. 별걸 다 엄마한테 묻지 마라. 자기 것은 스스로 개척하라.


한독약품 창업주 김신권 명예회장 …

부산 국제시장 화재 때도 찾아다니며 대금 다 갚아


김신권 명예 회장
한독약품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합작투자회사다. 1954년 설립 이후 한 해도 빼지 않고 ‘흑자경영’을 이어오고 있다. 김영진 한독약품 회장의 금과옥조는 ‘신뢰’다. 신뢰가 곧 회사, 아버지와 다름없는 ‘신사부일체(信社父一體)’다.

절망의 순간마다 신뢰 덕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거나 계약을 맺으며 기업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무(無)가 아니라 ‘마이너스(빚)에서 유(有)를 창조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김 회장의 아버지이자 한독약품 창업주인 김신권(90) 명예회장은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만상[灣商·조선시대에 의주 용만(龍灣)에서 중국과 교역하던 상인]의 후예다. 소설 『상도』에 등장하는 만상 백홍준이 외할아버지다. 김 명예회장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도 조선시대의 거상(巨商) 임상옥(林尙沃·1779~1855)이다.

 일제 치하에 찢어지게 가난했던 김 명예회장은 학업을 포기하고 압록강을 오가며 군밤, 군옥수수를 팔다 친척 소개로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약방개업 자격증인 ‘약종상전서’를 보고 삶의 희망을 봤다. 불굴의 19세 청년 김신권은 1940년, 최연소이자 한국인 최초의 합격자가 됐다. 문제는 돈이었다. 그때 교회의 한 집사가 “너를 평소에 눈여겨보았는데, 한번 약속한 일은 반드시 지키고 참으로 성실하더라. 실패해도 돈은 갚지 않아도 된다”며 1000원을 쥐여줬다. 지금으로 치면 5000만원이 넘는 거금이다. 이 돈으로 1941년 만주 안둥시 외곽에 금원당약방을 개업해 약업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1954년 창업 당시 연합약품. 동업인들이 연합해 세웠다는 의미로, 한독약품의 전신이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으로 피란을 왔다. 그는 품고 온 약 보따리를 밑천으로 국제시장 골목 한 모퉁이에서 좌판 약품상을 시작했다. 중국인들과 손을 잡고 페니실린이나 마이신 등을 팔아 장사는 날로 번창했지만 1953년 1월,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이 잿더미가 됐다. 해방 후 가장 큰 화재로 알려진 부산국제시장 대화재가 난 것. 울어도 시원찮은데 김 회장은 돈을 투자했거나 물건을 맡긴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대금을 지급했다. ‘화재가 아니라 지구가 망해도 신용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에 감동받은 지역 유지들과 자본가, 약업계 인사들은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김 회장에게 빌려주며 재기를 도왔다. 그들은 “김신권은 ‘빤스’를 팔아서라도 돈을 갚을 사람”이라고 했다. 이렇게 쌓은 신뢰는 1954년 연합약품(한독약품의 전신) 설립, 1964년 독일 훽스트(Hoechst)사와의 합작에 큰 발판이 됐다. 1975년 노동조합을 만들고 이듬해 주식시장에 기업공개(IPO)를 한 것도 노사 간, 주주와 기업 간 신뢰를 지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김영진 회장이 ‘신뢰’라는 한 단어를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가 회사 연혁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1996년, 아버지가 제게 그러시더군요. ‘네가 정말 신뢰를 마음에 새기고 상도(商道)를 지키면서 경영을 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해서 존경받는 기업체를 만들려면 (자리를 물려) 받고, 자신이 없거든 말거라’고요.” 최근 들어선 신뢰가 기업에 어떤 득이 됐느냐고 묻자, 김영진 회장은 크게 두 가지를 든다. 하나는 2005년 프랑스 제약업체 사노피가 적대적 인수합병(M&A)을 해왔을 때다. 흔히 적대적 M&A는 피인수 회사의 경영권을 노리지만 한독약품은 100% 독자경영을 보장받았다. 심지어 사노피는 사노피아벤티스의 한국법인 경영까지 김영진 회장에게 맡겼다. 사노피 측은 “유럽 제약업계 사이에 한독약품에 대한 평가가 매우 좋다”고 했다. 36년 노사 무분규도 신뢰의 결과란다. “비결이 뭡니까. 원하는 걸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나요?” 김 회장의 답은 심플하다. “협상을 많이 해봤는데 사측이 일단 넘어가려고 이것저것 약속해 버리면 안 돼요. 저는 해줄 수 있는 것만 약속합니다. 대신 약속하면 반드시 지킵니다. 서로 그걸 아니까요.”

j 칵테일 >> 인간문화재 건강검진에 도움 손길

김영진 회장은 ‘뭘 해야 사회에 진짜 도움이 될까’를 고민하다 ‘등잔 밑’에서 힌트를 얻었다. 1970년, 독일과 교류가 잦던 한독약품은 독일에 파견된 한국 간호사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김신권 당시 회장은 뭘 해야 제일 위로가 될까 고민하다 1970년 깍두기 3000여 통을 독일로 보냈고 간호사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이제 김영진 회장은 인간문화재들로 눈을 돌렸다. 선물은 깍두기 대신 독감 예방접종, 종합건강검진이다.

●언제부터, 누가 대상인가요.

 “2009년부터 문화재청과 함께 진행하는데, 중요무형문화재 기·예능 보유자가 대상이에요.”

●인간문화재라면 여유가 좀 있지 않나요.

 “실상은 달라요. 203명의 인간문화재 중 60명이 기초의료수급자예요. 지정된다고 다 생계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닌 거죠. 일례로 요즘엔 옛날 활을 안 써요. 다 플라스틱 쓰지.”

●성과가 좀 있나요.

 “11개 지역 병원과 협력해서 하는데 세 분은 용종이 발견돼서 치료받으셨어요. 골다공증 약도 받으시고요. 너무 좋아하세요. 치료도 치료지만 누군가 관심을 가져준다고요.”

●예산은 어디서 조달해요.

 
 “직원들에게 매월 1000원도 좋고, 1만원도 좋고 자발적으로 기부를 받는데, 기부금이 모이면 그만큼을 또 회사에서 대는 펀드가 있어요. 일시적으로 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꾸준히 할 겁니다.”